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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부정공>정효비각중수기(旌孝碑閣重修記)
旌孝碑閣重修記 此趙先生旌孝碑也夫孝固百行之源特道學中一事耳若之何以先生而只以孝稱焉誠以學莫先於爲仁仁莫大乎孝親故用以是標揭而樹風敎此其有綽楔之錫歟先生挺生於國運隆盛之初禀秀異之姿全仁孝之性篤志於爲仁之本推仁於躬行之餘在乎家庭而家敎立行乎鄉黨而鄉俗化其實德之可攷咳唾之餘沬必不啻多矣世遠矣沒沒無傳乃若其懿德之不可泯者則今尚可徵盖其純性至孝靡不用極生養致其愛死葬盡其禮居前後喪哀戚備至負土居廬創殘骨立有令人感動者乃其事繼母無所間服其喪一如前鄉邦莫不稱孝肆我世宗大王特命旌其閭具載興誌而亦入於三綱行實以垂來後在今殆三百年而學士大夫慕其賢黎民庶徒懷其行尊仰之心久猶不衰其非德行之溥博豈能然乎嘗在丙戌間章甫齊聲合謀建祠於謙川之上爼豆式薦規制略備崇報之道既無所憾獨其旌孝之碑歲久剝落幾不能以字碑閣傷圮殆未盖障其爲士林之慨傷而思所改圖久矣於是先生之遺裔泰望愾然謀諸宗曰立祠祀公議也宜其士林之爲改碑閣私事也實爲子孫之責也遂相與出力而營之埋舊碑於閣之後斵新石而易焉石樣比舊稍大而字亦有加於舊耳不日而功吿訖實甲辰至月也至是巨石屹如丹閣煥如可久遠而長存此不但昆之塞其願先王之盛典由是而益彰其非小幸也碑舊在淳昌故址 崇禎紀元後三十四年辛丑移樹於順天之淸香亭今之在此者後十三年癸丑之所移也先生盖嘗世居于淳及末年卜幽居於順之洛水陽雖其進身于朝莫布其志業而謝事南歸則徜徉於水石梅竹之間以終焉故移碑於斯以寓其慕幸而與祠屋相終始而並立宮墻突兀範躅依如人之過乎此者莫不惺然有象賢之志油然有孝親之心信矣盛德入人深而遺敎之範俗遠也然不有我 聖主垂褒嘉而詔來後則其所以興起感發者能如是乎猗歟哉恭惟我朝文敎丕闡明 宣之際群賢輩出倡聖學於既湮承洛建之嫡傳蔚爲後學標準此誠道學之盛際而若夫道學之未盛也欲人之有實學也難矣先生乃能倡明務本之學於麗季衰亂之後雖其授受未有傳於後者而盖其肇啓正學之垂則先生有以先之也先生之功厥亦大矣苟於先生乎觀感求先生孝親底一箇仁則推之事君君道尊推之使民民生安又推以大之可以繼曾氏之眞傳此孔聖所謂本立道生者而後學之所宜勉勵凡後之人愼無以四尺之碑數字之鐫而少之也 後孫 彦臣 謹識 정효비각중수기(旌孝碑閣重修記) 이는 조 선생의 효행을 정포한 비이다. 무릇 효도는 진실로 모든 행실의 근원이요 특히 도학 가운데 一사(一事)인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한 말인가. 선생은 다만 효도로써 지칭하였는데 진실로 학문은 인(仁)보다 먼저 할 것이 없고 인은 어버이께 효도하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로써 지절을 걸고 풍교를 세워 그 정문을 지어 포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선생은 국운이 융성한 때에 태어나 특수한 바탕을 품수(禀受)하였고 인효(仁孝)한 성품을 온전히 하였으며 인의의 근본에 뜻을 돈독히 하고 인의를 몸소 행한 다음에 미루어 가정에 있으면 가교(家敎)가 수립되고 향당에 나아가면 고을 풍속이 순화되었으니 그 실덕을 가히 상고하겠으나 그러나 이는 언어의 남은 거품이므로 반드시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세대가 멀어져 민몰(泯沒)되고 전한 것이 없다. 이에 그 아름다운 덕의 버리지 못할 것은 이제 증거하거니와 대개 그 순실한 성품과 지극한 효도는 다하지 아니함이 없어 생전 봉양에 그 사랑을 이루고 사후 장례에 그 예를 다하였으며 전후거상에 슬픔과 근심을 같이하여 여막살이로 잔약한 뼈만 남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였다. 그 계모를 사이 없이 섬기고 그의 초상을 먼저와 같이하니 향방(鄉邦)이 효도를 칭찬하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 세종대왕(世宗大王)이 특별히 정문을 명하고 갖추어 「여지(輿誌)」에 싣고 또 「三강행실(三綱行實)」에 기록하여 후세에 표본이 되게 한 지가 지금에 있어 자못 三백 년인데 학사대부(學士大夫)는 그 어짊을 추모하고 뭇 백성은 그 행실을 사모하여 높이 우러르는 마음이 오래도록 시들지 아니하니 그 덕행의 광대함이 아니면 어찌 능히 그럴 것인가. 일찍이 병술 년간에 있어 사림이 소리를 모으고 꾀를 합하여 겸천 위에 사우를 세우고 제사를 올리니 규모와 예제는 대략 갖추어져 그 덕망에 보답하는 도리에는 유감이 없으나 홀로 정효비(旌孝碑)가 오래되었으므로 글자가 떨어져 알아볼 수 없고 비각이 퇴락하여 자못 덮고 막지 못한 것이 사림의 개탄한 바가 되어 다시 세울 바를 생각함이 오래였다. 이때에 선생의 후예 태망(泰望)이 강개하여 제종과 의논하되 사우를 세워 향사한 것은 공의(公議)이니 마땅히 사림이 할 바요, 비각을 개수한 것은 사사(私事)라 실상 자손의 책임이다라고 말하고 마침내 서로 힘을 내어 경영하여 구비는 각의 뒤에 묻고 새 돌을 깎아 바꾸니 돌 모양이 먼저 것보다 커서 글자가 더 들어가고 빨리 준공되니 이때가 갑진년 동짓달이었다. 이에 이르러 큰 비돌이 높고 단청한 비각이 빛나 가히 영원히 보존하게 되니 이는 다만 후손의 소원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선왕의 성대한 은전이 이로 인하여 더욱 밝게 되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로다. 비는 처음 순창 옛 터에 있었는데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 三十四년 신축년(一六六一)에 순천의 청향정(清香亭)에 옮겨 세웠다가 이제 여기에 있는 것은 후 十三년 계축년에 옮긴 것이다.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순창에 살다가 말년에 유거(幽居)를 순천 낙수 남쪽(順之洛水陽)으로 옮겼는데 이는 비록 조정에 나갔으나 그 뜻과 업을 펼 수 없으므로 사퇴하고 남으로 내려와서 수석 매죽(水石梅竹)의 사이에 노닐면서 한 평생을 마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를 이에 옮겨서 그 추모의 뜻을 부치니 다행히 사옥(祠屋)으로 더불어 서로 종시(終始)가 되고 궁장(宮墻)이 높이 솟아 모범할 자취가 의연하니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면 어진 이를 본받을 뜻을 가지고 어버이께 효도할 마음을 가질 것이다. 참으로 성덕이 사람을 감화함이 깊고 유교가 세속의 법칙이 된 지 오래이나 우리 성주가 포가(褒嘉)를 내려 후생을 가르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처럼 감격하여 분발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삼가 생각하니 우리나라 문교(文敎)가 크게 열려 명종(明宗), 선조(宣祖) 연간에 어진 사람이 많이 배출되어 이미 인몰(湮沒)한 성학(聖學)을 창동(倡動)시키고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전한 근본을 이어 울연(蔚然)이 후학의 표준이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도학의 성제(盛際)라 하겠다. 그런데 도학이 성하지 못할 때에는 사람이 학문을 하려 해도 이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능히 무본지학(務本之學)을 고려 말 쇠란한 후에 불러 밝혔다. 비록 그 주고받은 것이 후세에 전하지 못했으나 대개 그 바른 학문을 처음 개발하여 후세에 끼친 것은 선생이 먼저 하였으니 선생의 공이 그 또한 크지 않은가! 진실로 선생을 보려 하면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던 인(仁)을 구하라. 이것을 미루어 인군을 섬기면 군도(君道)가 높고 이것을 미루어 백성을 부리면 생민이 편안하며 또 미루어 크게 하면 가히 증 씨(曾氏)의 진전(眞傳)을 이을 것이니 이것이 공성(孔聖)의 이른바 근본을 세우면 도가 생긴다는 것이므로 후학은 마땅히 힘써 강마할 바이다. 무릇 후인은 삼가 四척의 비에 두어 자의 새김이라 하여 적게 여기지 말지어다. 後孫 彥臣 삼가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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